후지모토 사다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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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지모토 사다요시는 일본의 야구 선수, 감독, 야구 해설가였다. 마쓰야마 상업학교와 와세다 대학에서 투수로 활약했으며, 1936년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초대 감독을 맡아 7년간 7번의 우승을 이끌며 팀의 황금기를 구축했다. 이후 쇼치쿠 로빈스, 다이에이 스타스, 한큐 브레이브스, 한신 타이거스 등 여러 구단의 감독을 역임했으며, 한신에서는 2번의 리그 우승을 달성했다. 그는 일본 프로 야구 최초로 선발 로테이션을 도입하는 등 현대 야구의 선구자적인 역할을 했으며, 선수들의 인심을 얻는 지도자로 평가받았다. 1974년에는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으며, 1981년 7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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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모토 사다요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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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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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후지모토 사다요시 |
원어 이름 | 藤本 定義 (Fujimoto Sadayoshi) |
출생일 | 1904년 12월 20일 |
사망일 | 1981년 2월 18일 |
출생지 | 에히메현 마쓰야마시 |
선수 경력 | |
포지션 | 투수 |
투구/타석 | 우투/우타 |
경력 (선수) | 애히메현립 마쓰야마 상업학교 구제 와세다 대학 오사카 철도국 스이타 |
감독 및 코치 경력 | |
경력 (감독 및 코치) | 도쿄 철도국 도쿄 교진군 (1936년 - 1942년) 퍼시픽/다이요 로빈스 (1946년 - 1947년) 긴세이 스타스/다이에이 스타스 (1948년 - 1956년) 한큐 브레이브스 (1957년 - 1959년) 오사카 타이거스/한신 타이거스 (1960년 - 1968년) |
감독 기록 | |
데뷔 리그 | JBL |
데뷔 년도 | 1936년 |
데뷔 팀 | 도쿄 교진 |
마지막 날짜 | 1968년 10월 23일 |
마지막 팀 | 한신 타이거스 |
통계 리그 | JBL/NPB |
경기수 (감독) | 3,193 |
감독 기록 | 1,655승 1,445패 |
승률 | 0.534 |
팀 (감독) | 도쿄 교진 (1936년–1942년) 퍼시픽 야구 클럽/다이요 로빈스 (1946년–1947년) 긴세이/다이에이 스타스 (1948년–1956년) 한큐 브레이브스 (1957년–1959년) 한신 타이거스 (1961년–1968년) |
수상 내역 | 7x JBL 챔피언 (1936년 가을–1937년 봄, 1938년 가을–1942년) 2x 센트럴 리그 우승 (1962년, 1964년) |
명예의 전당 링크 |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 |
명예의 전당 유형 | 일본 |
명예의 전당 헌액 년도 | 1974년 |
선정 국 | 일본 |
선정 년도 | 1974년 |
선정 방법 | 경기자 표창 |
2. 선수 경력
마쓰야마 상업학교(현재의 에히메 현립 마쓰야마 상업고등학교), 와세다 대학에서 투수로 활약했으며 1925년 가을에 부활된 와세다와 게이오기주쿠 대학의 정기전인 소케이센에서 승리 투수가 됐다. 당시에 날카로운 커브를 다루어 ‘곡선의 후지모토’(カーブの藤本일본어)라고 불리었다. 졸업 후 도쿄 철도국 야구부(현재의 JR 동일본 경식 야구부)의 감독이 됐다. 1935년 제1회 미국 원정에서 귀국한 도쿄 교진군과의 순회 경기에서 2승을 올렸다. 이 때의 순회 경기에서 도쿄 교진군은 36승 3패를 기록했는데 3패 중 2패를 기록시킨 수완을 인정받아 도쿄 교진군의 감독으로 초빙됐다.[43]
1936년 6월 16일에 제2회 미국 원정에서 귀국한 팀에 감독으로서 합류했다. 이 해부터 시작된 공식 경기에 임했지만 그 직후 하계 대회에서 2승 5패를 기록하여 참패했다.[44] 이러한 경위에서 요미우리의 구단 역사는 후지모토를 초대 감독으로 규정하고 있다. 또한 미국 원정에서 컨디션이 떨어져 있던 팀을 강화하기 위해 미하라 오사무를 조감독 겸임 선수로 복귀시켜 군마현 다테바야시시의 분부쿠 구장에서 맹연습을 했다.[45] 추계 대회에서는 도쿄 교진군을 공식전 제1회 우승 구단으로 이끌었다. 감독 재임 7년간 9시즌 7차례 우승이라는 요미우리의 1차 황금기를 구축했으며 1943년 시즌 종료 후인 1월 14일에 사임했다(참고로 당시 후지모토는 요미우리의 운영 회사인 ‘주식회사 대일본도쿄야구클럽’의 이사도 겸임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에 대해서도 사의를 표명했지만 구단은 감독 사표만 수리했다). 이후 후지모토는 아사히군의 구단주였던 다무라 고마지로에게서 다무라가 경영하는 다무라코마의 비서로 일하며 공습으로 집을 잃은 전쟁 말기에는 도쿄의 다무라코마 관저에서 다무라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당시에 다무라가 후지모토를 부른 이유는 훗날 아사히군의 감독으로 임명할 의향이 있었기 때문이다.[46]
1946년에는 다무라의 의향을 받아들여 프로 야구가 재개되자 퍼시픽의 감독으로 야구계에 복귀했다. 또한 선수들의 처우 개선을 위해 ‘일본 야구 선수회’(현재의 일본 프로 야구 선수회)를 발족시켜 초대 회장으로 취임했다. 1947년 12월 4일부로 감독직을 사임했으며 1948년부터 1956년까지 긴세이 스타스(1949년부터는 ‘다이에이 스타스’로 구단명을 변경)의 감독, 1957년부터 1959년까지 한큐 브레이브스의 감독을 지냈으며, 1959년 12월 14일에 한신 타이거스의 수석 겸 투수 코치로 취임했다. 1961년 시즌 도중인 6월 6일부터 한신 감독 대행으로 부임하면서 같은 해인 7월 19일에 감독으로 승격했다. 1962년에 ‘타도 요미우리’를 내걸고[47] 요미우리의 OB인 아오타 노보루를 코치로 초빙해 1962년과 1964년에 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1965년 10월 28일에 자신은 총감독으로 부임하고 스기시타 시게루 투수 코치에게 감독 자리를 넘겨줬다. 하지만 시즌 도중 스기시타가 감독직에서 사임함에 따라 1966년 8월 13일에 다시 감독으로 복귀했다. 1968년 10월 21일에 용퇴하겠다는 입장을 밝혀 같은 해 11월 19일 구단의 기술 고문으로 발탁됐다. 감독으로 재임한 기간인 29년은 역대 최장 기간이며 감독으로서 재임한 구단수인 5개는 미하라 오사무, 이시모토 슈이치와 대등한 타이 기록이다. 또한 1968년의 1군 감독 재임은 프로 선수로서의 경험이 없는 1군 감독이 재임한 마지막 사례였다.
전쟁 이전에는 ‘모린지의 맹연습’(茂林寺の猛練習일본어)이라는 스파르타 감독의 이미지가 강했으나 전쟁 이후에는 ‘이요의 옛 너구리’(伊予の古狸일본어)라는 별명을 취하는 것처럼 지략을 앞세웠다. 또한 선수단의 인심 장악에 뛰어난 감독이었다.[48]
1937년 리그전에서는 동일 구단과의 2연전에서 “1차전에 사와무라 에이지, 2차전에 빅토르 스타루힌 또는 마에카와 하치로를 투입한다”와 “선발 투수는 사전 등판일을 예고한다”[49]라는 등의 현대의 선발 로테이션 개념과 비슷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다. 한큐 브레이브스 감독 시절 일본에서 처음으로 ‘선발 로테이션’을 본격적으로 도입해 팀의 에이스였던 요네다 데쓰야와 가지모토 다카오를 일정한 등판 간격으로 기용하면서 당시 일반적인 방식이었던 에이스 연속 기용을 가리켜 “30승 투수를 내는 것은 감독의 수치”라며 정면으로 비판했다. 한신에서도 로테이션을 기용해 1962년에는 고야마 마사아키와 무라야마 미노루, 1964년에는 진 바크의 활약으로 우승했다. 고야마와 무라야마를 축으로 페넌트레이스의 초점이 될 요미우리전부터 역으로 계산해 선발 투수를 정하는 이른바 ‘두루마리 로테이션’이라는 방식을 사용하기도 했다. 한편 선발, 계투진이나 마무리를 기용하는 투수 분업제는 싫어하고 선발 완투형의 투수를 추구했다. 1962년의 고야마는 26차례 완투, 무라야마가 23차례 완투를 기록했으며 1964년에는 바크가 24차례 완투를 기록했다.
후지모토는 도쿄 철도국에 근무하던 시절 통계계로서 국철 각 역의 승강 인원을 집계 정리하는 업무를 담당했던 적이 있어 이 경험이 로테이션 제도의 확립에 도움이 됐다는 말도 있다.
자신이 선수 시절 투수였던 일이 있어 젊은 투수를 귀여워했다.[50] 어깨를 다쳐 요미우리에서 푸대접을 받던 사와무라를 친절하게 돌봐주었고[50] 러시아계라는 이유로 팀 동료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던 스타루힌을 항상 두둔해주었다.[50] 한신의 감독 시절에는 에나쓰 유타카를 아꼈는데[50] 기숙사 방에 에나쓰를 불러 차를 마시며 스타루힌과 사와무라의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50] 이후 1979년에 에나쓰가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서 첫 우승을 경험했을 때 지팡이를 짚고 나타나 “잘됐구나”라며 축하해주었다.[50]
1970년부터 호치 신문 평론가를 맡았고 1974년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1974년부터 1979년까지 선 TV의 야구 해설자를 맡았고(주로 한큐전의 해설을 담당) 1981년 2월 18일에 향년 76세의 일기로 사망했다.
첫 번째 아내는 전쟁중인 1945년에 잃었고 이후에 다무라 고마지로의 도움으로 다무라의 먼 친척 여성과 재혼했다.[51]
2. 1. 마쓰야마 상업학교 시절
후지모토 사다요시는 에히메현립 마쓰야마 상업학교에 진학하여 1920년부터 1923년까지 4년 연속 전국 중등 학교 우승 야구 대회에 출전했다.[12] 1921년 제7회 전국 중등 학교 우승 야구 대회부터 투수로 활약했다.[14] 1923년에는 간사이 학생 연합 야구 대회와 근현 중등 학교 야구 대회에서 우승했다.[16][17]1920년 (다이쇼 9년)의 제6회 전국 중등 학교 우승 야구 대회에서는 야수로 출전하여 준결승에서 게이오 보통부와 대결, 연장 16회 접전 끝에 3-4로 패배했다.[13] 1922년 (다이쇼 11년)의 제8회 전국 중등 학교 우승 야구 대회에서는 준결승에서 하마사키 신지를 둔 고베 상업과 대결하여, 백열한 투수전 끝에 내야 수비의 혼란을 틈타 1-2로 끝내기 패배를 당했다.[15] 1923년 여름의 제9회 전국 중등 학교 우승 야구 대회에서는 우승 후보로 꼽혔지만, 2회전에서 고요중과 대결하여, 9회 초에 역전 3점 홈런을 허용하며 패배했다.[16][17]
2. 2. 와세다 대학 시절
후지모토는 와세다 대학에 진학하여 투수로 활약하며 날카로운 커브를 던져 '곡선의 후지모토'라고 불렸다.[19] 1925년 가을에 부활한 소케이센(와세다-게이오 정기전)에서는 10월 20일의 제2전에 등판하여 승리 투수가 되었다.[18] 1929년 와세다 대학 상학부를 졸업했다.[18]3. 지도자 경력
마쓰야마 상업학교, 와세다 대학에서 투수로 활약했으며 1925년 가을에 부활된 와세다와 게이오기주쿠 대학의 정기전인 소케이센에서 승리 투수가 됐다. 당시에 날카로운 커브를 다루어 ‘곡선의 후지모토’(カーブの藤本일본어)라고 불리었다. 졸업 후 도쿄 철도국 야구부(현재의 JR 동일본 경식 야구부)의 감독이 됐다. 1935년 제1회 미국 원정에서 귀국한 도쿄 교진군과의 순회 경기에서 2승을 올렸다. 이 때의 순회 경기에서 도쿄 교진군은 36승 3패를 기록했는데 3패 중 2패를 기록시킨 수완을 인정받아 도쿄 교진군의 감독으로 초빙됐다.[43]
1936년 6월 16일에 제2회 미국 원정에서 귀국한 팀에 감독으로서 합류했다. 이 해부터 시작된 공식 경기에 임했지만 그 직후 하계 대회에서 2승 5패를 기록하여 참패했다.[44] 이러한 경위에서 요미우리의 구단 역사는 후지모토를 초대 감독으로 규정하고 있다. 또한 미국 원정에서 컨디션이 떨어져 있던 팀을 강화하기 위해 미하라 오사무를 조감독 겸임 선수로 복귀시켜 군마현 다테바야시시의 분부쿠 구장에서 맹연습을 했다.[45] 추계 대회에서는 도쿄 교진군을 공식전 제1회 우승 구단으로 이끌었다. 감독 재임 7년간 9시즌 7차례 우승이라는 요미우리의 1차 황금기를 구축했으며 1943년 시즌 종료 후인 1월 14일에 사임했다(참고로 당시 후지모토는 요미우리의 운영 회사인 ‘주식회사 대일본도쿄야구클럽’의 이사도 겸임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에 대해서도 사의를 표명했지만 구단은 감독 사표만 수리했다). 이후 후지모토는 아사히군의 구단주였던 다무라 고마지로에게서 다무라가 경영하는 다무라코마의 비서로 일하며 공습으로 집을 잃은 전쟁 말기에는 도쿄의 다무라코마 관저에서 다무라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당시에 다무라가 후지모토를 부른 이유는 훗날 아사히군의 감독으로 임명할 의향이 있었기 때문이다.[46]
1946년에는 다무라의 의향을 받아들여 프로 야구가 재개되자 퍼시픽의 감독으로 야구계에 복귀했다. 또한 선수들의 처우 개선을 위해 ‘일본 야구 선수회’(현재의 일본 프로 야구 선수회)를 발족시켜 초대 회장으로 취임했다. 1947년 12월 4일부로 감독직을 사임했으며 1948년부터 1956년까지 긴세이 스타스(1949년부터는 ‘다이에이 스타스’로 구단명을 변경)의 감독, 1957년부터 1959년까지 한큐 브레이브스의 감독을 지냈으며, 1959년 12월 14일에 한신 타이거스의 수석 겸 투수 코치로 취임했다. 1961년 시즌 도중인 6월 6일부터 한신 감독 대행으로 부임하면서 같은 해인 7월 19일에 감독으로 승격했다. 1962년에 ‘타도 요미우리’를 내걸고[47] 요미우리의 OB인 아오타 노보루를 코치로 초빙해 1962년과 1964년에 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1965년 10월 28일에 자신은 총감독으로 부임하고 스기시타 시게루 투수 코치에게 감독 자리를 넘겨줬다. 하지만 시즌 도중 스기시타가 감독직에서 사임함에 따라 1966년 8월 13일에 다시 감독으로 복귀했다. 1968년 10월 21일에 용퇴하겠다는 입장을 밝혀 같은 해 11월 19일 구단의 기술 고문으로 발탁됐다. 감독으로 재임한 기간인 29년은 역대 최장 기간이며 감독으로서 재임한 구단수인 5개는 미하라 오사무, 이시모토 슈이치와 대등한 타이 기록이다. 또한 1968년의 1군 감독 재임은 프로 선수로서의 경험이 없는 1군 감독이 재임한 마지막 사례였다.
전쟁 이전에는 ‘모린지의 맹연습’(茂林寺の猛練習일본어)이라는 스파르타 감독의 이미지가 강했으나 전쟁 이후에는 ‘이요의 옛 너구리’(伊予の古狸일본어)라는 별명을 취하는 것처럼 지략을 앞세웠다. 또한 선수단의 인심 장악에 뛰어난 감독이었다.[48]
1937년 리그전에서는 동일 구단과의 2연전에서 “1차전에 사와무라 에이지, 2차전에 빅토르 스타루힌 또는 마에카와 하치로를 투입한다”와 “선발 투수는 사전 등판일을 예고한다”[49]라는 등의 현대의 선발 로테이션 개념과 비슷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다. 한큐 브레이브스 감독 시절 일본에서 처음으로 ‘선발 로테이션’을 본격적으로 도입해 팀의 에이스였던 요네다 데쓰야와 가지모토 다카오를 일정한 등판 간격으로 기용하면서 당시 일반적인 방식이었던 에이스 연속 기용을 가리켜 “30승 투수를 내는 것은 감독의 수치”라며 정면으로 비판했다. 한신에서도 로테이션을 기용해 1962년에는 고야마 마사아키와 무라야마 미노루, 1964년에는 진 바크의 활약으로 우승했다. 고야마와 무라야마를 축으로 페넌트레이스의 초점이 될 요미우리전부터 역으로 계산해 선발 투수를 정하는 이른바 ‘두루마리 로테이션’이라는 방식을 사용하기도 했다. 한편 선발, 계투진이나 마무리를 기용하는 투수 분업제는 싫어하고 선발 완투형의 투수를 추구했다. 1962년의 고야마는 26차례 완투, 무라야마가 23차례 완투를 기록했으며 1964년에는 바크가 24차례 완투를 기록했다.
후지모토는 도쿄 철도국에 근무하던 시절 통계계로서 국철 각 역의 승강 인원을 집계 정리하는 업무를 담당했던 적이 있어 이 경험이 로테이션 제도의 확립에 도움이 됐다는 말도 있다.
자신이 선수 시절 투수였던 일이 있어 젊은 투수를 귀여워했다.[50] 어깨를 다쳐 요미우리에서 푸대접을 받던 사와무라를 친절하게 돌봐주었고[50] 러시아계라는 이유로 팀 동료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던 스타루힌을 항상 두둔해주었다.[50] 한신의 감독 시절에는 에나쓰 유타카를 아꼈는데[50] 기숙사 방에 에나쓰를 불러 차를 마시며 스타루힌과 사와무라의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50] 이후 1979년에 에나쓰가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서 첫 우승을 경험했을 때 지팡이를 짚고 나타나 “잘됐구나”라며 축하해주었다.[50]
3. 1. 도쿄 철도국 감독
후지모토 사다요시는 1933년부터 도쿄 철도국 야구부 감독을 맡았다. 1935년, 미국 원정에서 귀국한 도쿄 교진군(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전신)과의 순회 경기에서 2승을 거두며 능력을 인정받았다.3. 2. 요미우리 자이언츠 감독 (1936년 ~ 1942년)
1936년 도쿄 교진군(현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초대 감독으로 취임했다.[21] 같은 해부터 시작된 일본 직업 야구 공식전에 참가했지만, 하계 대회에서는 2승 5패로 참패했다.[21] 이러한 결과는 미국 원정 이후 선수들의 자만심 때문이라고 판단한 후지모토는 팀을 단련시키기 위해 징병을 마친 미하라 오사무를 보조 감독 겸 선수로 복귀시켜 군마현 다테바야시시의 분푸쿠 구장에서 '모린지의 맹연습'이라 불리는 혹독한 훈련을 실시했다.[22] 그 결과, 추계 대회에서 공식전 첫 우승을 달성했다.
이후 1937년 춘계 리그, 1938년 추계 리그, 그리고 1939년부터 1942년까지 4년 연속 리그 우승을 달성하며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제1차 황금기를 이끌었다. 특히, 1940년과 1942년 시즌은 일본 야구 역사상 가장 압도적인 시즌으로 평가받는다.[4] 후지모토 감독 체제 하에서 빅토르 스타르핀, 가와카미 데쓰하루 등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많은 선수들이 활약했다.[7]
1941년 9월, 구단 간부와의 사소한 말다툼 끝에 폭행 사건이 발생했고, 후지모토는 즉시 감독직 사의를 표명했다. 선수들의 설득으로 10월 말에 복귀했지만,[23] 1942년 시즌 종료 후 구단과의 갈등 심화와 태평양 전쟁의 격화를 이유로 감독직에서 완전히 물러났다.[24]
1936년, 스사키 구장에서 열린 도쿄 교진군 대 오사카 타이거스(한신 타이거스)의 경기(직업 야구 연도 우승 결정전 3차전)를 촬영한 8mm 영상이 2010년대에 발견되었는데, 이 영상에서 후지모토가 1루 베이스 코치로 활동하는 모습이 확인되었다.[52]
3. 3. 쇼치쿠 로빈스 감독 (1946년 ~ 1947년)
1946년, 전쟁 이후 프로 야구가 재개되면서 후지모토 사다요시는 퍼시픽(쇼치쿠 로빈스의 전신)의 감독으로 취임했다.[26] 전쟁 이전에는 아사히 야구단(Asahi Baseball Club)으로 불렸던 퍼시픽 야구단(Pacific Baseball Club)은 창단 이후 성적이 좋지 않았으며, 10년의 역사 동안 단 한 번의 승리 시즌을 기록했다.[26] 후지모토는 "전쟁이 끝나고 일본도 원점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니 직업 야구도 원점에서 다시 출발해야 한다. 따라서 선수들 역시 자유롭게 구단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56] 이러한 철학을 바탕으로, 전쟁 이전에 도쿄 교진군 소속이었던 빅토르 스타루힌과 시라이시 가쓰미, 그리고 전쟁 이전에는 한신 소속이던 후지이 이사무를 도쿄 교진군과 한신 양 구단의 허가 없이 퍼시픽에 입단시켰다.[55]이에 대해 일본 야구 연맹은 “조사도 필요하고, 다양한 의견을 청취해서 신중하게 결정해야 한다. 그 때까지는 대상 선수들의 출전을 일시 보류하기로 한다”라는 권고를 전 구단을 상대로 내렸다.[55] 연맹의 조사는 장기화되었고, 세 선수들의 출전을 바라는 팬들의 목소리도 높았기에, 후지모토는 5월 20일의 세네터스전, 5월 23일의 그레이트 링전, 5월 24일의 한큐 브레이브스전, 5월 26일의 그레이트 링전(모두 한큐 니시노미야 구장) 등 모두 4경기에 시라이시와 후지이 등 두 명의 선수를 연맹의 허가 없이 출전시켰다.[55] 이 사실을 안 도쿄 교진군과 한신은 일본 야구 연맹에 제소했다.[57]
결국 10월 4일, 일본 야구 연맹은 “전전의 소속 구단에서 급여를 못 받았기 때문에 세 선수의 퍼시픽 이적은 허가하나, 시라이시와 후지이가 출전했던 5월의 네 경기는 퍼시픽의 선수라는 판정이 나오기 이전으로 간주하여 몰수 경기로 한다”라는 판정을 내렸다.[58] 이와 동시에 후지모토는 10월 10일부터 10월 18일까지 출장 정지 처분과 200엔의 벌금이 부과됐다.[58]
후지모토는 선수들의 권익 보호를 위해 노력했다. 일본 프로 야구 선수회를 발족시켜 초대 회장을 역임했다.[26]
1947년, 팀은 타이요 로빈스로 팀명을 변경했지만, 후지모토 감독 하에서 50승 64패 5무의 성적으로 시즌을 마감하며 승리 시즌을 달성하지 못했다.[25] 1947년 12월 4일을 기해 후지모토는 퍼시픽 감독을 사임하고 퇴단했다.
3. 4. 다이에이 스타스 감독 (1948년 ~ 1956년)
후지모토 사다요시는 1948년 긴세이 스타스의 감독으로 취임했다.[8] 긴세이 스타스는 창단 3년 차의 신생 팀이었다. 1949년 팀명을 다이에이 스타스로 변경하였고,[8] 1949년과 1950년에 각각 67승 65패 2무, 62승 54패 4무를 기록하며 팀을 3위로 이끌었다.[8] 1950년 일본 야구 기구가 설립되고 일본 야구 연맹이 해체되면서, 다이에이 스타스는 퍼시픽 리그의 창립 멤버가 되었다.연도 | 소속 | 순위 | 경기 | 승리 | 패전 | 무승부 | 승률 | 승차 | 팀 홈런 | 팀 타율 | 팀 평균자책점 | 연령 |
---|---|---|---|---|---|---|---|---|---|---|---|---|
1948년 | 긴세이 다이에이 | 7위 | 140 | 60 | 73 | 7 | .451 | 25.5 | 43 | .229 | 2.84 | 44세 |
1949년 | 3위 | 134 | 67 | 65 | 2 | .508 | 17.5 | 130 | .272 | 4.15 | 45세 | |
1950년 | 3위 | 120 | 62 | 54 | 4 | .534 | 19.5 | 91 | .260 | 3.70 | 46세 | |
1951년 | 4위 | 101 | 41 | 52 | 8 | .441 | 29.5 | 46 | .239 | 3.33 | 47세 | |
1952년 | 4위 | 121 | 55 | 65 | 1 | .458 | 21 | 68 | .243 | 3.38 | 48세 | |
1953년 | 3위 | 120 | 63 | 53 | 4 | .543 | 6.5 | 30 | .237 | 2.67 | 49세 | |
1954년 | 8위 | 140 | 43 | 92 | 5 | .319 | 46 | 47 | .222 | 3.53 | 50세 | |
1955년 | 6위 | 141 | 53 | 87 | 1 | .379 | 46 | 41 | .228 | 2.99 | 51세 | |
1956년 | 7위 | 154 | 57 | 94 | 3 | .380 | 41 | 46 | .227 | 2.89 | 52세 |
이후 1951년(41승 52패 8무)과 1952년(55승 65패 1무)에는 4위를 기록하며 다소 부진했으나, 1953년에는 63승 53패 4무로 다시 3위에 올랐다. 하지만 이후 1954년부터 1956년까지는 각각 8위, 6위, 7위로 하위권을 맴돌았다.[8]
3. 5. 한큐 브레이브스 감독 (1957년 ~ 1959년)
후지모토 사다요시는 1957년부터 1959년까지 한큐 브레이브스 감독을 맡았다. 1957년에는 71승 55패 6무, 1958년에는 73승 51패 6무를 기록하며 처음 두 시즌 동안 좋은 성적을 거두었으나, 1959년에는 48승 82패 4무로 부진한 성적을 기록했다.후지모토는 일본 프로 야구 최초로 선발 로테이션을 본격적으로 도입한 감독으로 알려져 있다. 요네다 데쓰야, 가지모토 다카오 등 에이스 투수들을 효과적으로 기용하기 위해 등판 간격을 조절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그는 "30승 투수를 배출하는 것은 감독의 수치"라며 당시 일반적이었던 에이스 투수의 연속 기용을 비판했다.
3. 6. 한신 타이거스 감독 (1961년 ~ 1968년)
1960년 오사카 타이거스의 헤드 겸 투수 코치로 취임한 후지모토 사다요시는[27] 1961년 시즌 도중 감독 대행으로 부임했고, 이후 정식 감독으로 승격했다.[27] 감독 취임 후 첫 시즌은 60승 67패 3무로 4위에 그쳤지만,[9] 후반기 37승 27패 1무를 기록하며 선수들에게 "이것이 우승 베이스다. 이 맛을 잊지 마라"라고 말하며 자신감을 불어넣었다.[27]1962년, 후지모토는 "타도 요미우리"를 내걸고 아오타 노보루를 헤드 코치로 초빙하고, 진 버키를 철저하게 훈련시키는 등 투수진을 강화하여[27] 75승 55패 3무의 성적으로 센트럴 리그 우승을 달성했다.[9] 일본 시리즈에서는 도에이 플라이어스에게 패하며 준우승에 머물렀다.[10] 1964년에도 80승 56패 4무로 센트럴 리그 우승을 차지했지만,[9] 일본 시리즈에서 난카이 호크스에게 패하며 다시 한번 준우승에 그쳤다.[11] 한신 감독으로서 두 번의 리그 우승은 1 리그 시대의 이시모토 슈이치[28]・와카바야시 타다시[29]에 이은 3번째 기록이었다.[27]
1965년에는 총감독으로 물러났으나,[27] 1966년 시즌 도중 감독으로 복귀했다.[27] 1968년 10월 21일 용퇴를 신청할 때까지[27] 한신을 이끌었으며, 감독으로서의 실동 기간은 29년으로 역대 최장 기록이다.[27]
1967년 올스타전에서 에나쓰 유타카를 혹사시킨 가와카미 데쓰하루 요미우리 자이언츠 감독에게 "야, 데쓰(哲)[53]! 우리 유타카(에나쓰)를 엄하게 쓰고 말이야. 왜 그랬어? 이 자식!"이라고 격렬하게 꾸짖은 일화는 유명하다.[54]
4. 은퇴 이후
후지모토 사다요시는 1970년부터 현장을 떠나 호치 신문의 전속 평론가로 활동했다. 1974년에는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또한 같은 해부터 1979년까지 선 TV 박스석 야구 해설자를 맡았다.
1981년 2월 18일, 향년 7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통산 감독 승수는 일본 프로 야구 감독 중 역대 3위에 해당한다.
2010년대에는 1936년의 직업 야구 연도 우승 결정전이 된 도쿄 교진군과 오사카 타이거스 (스자키 구장)의 3차전 모습이 관객이 8mm 카메라로 촬영한 영상이 발견되었는데, 후지모토가 도쿄 교진군의 공격 시 1루 측 베이스 코치로 서서 공격을 지휘하는 모습이 확인되었다.
5. 감독 스타일 및 평가
후지모토 사다요시는 초기에는 '모린지의 맹연습'으로 대표되는 스파르타식 훈련을 중시했다. 그러나 전쟁 이후에는 '이요의 고타누키'라는 별명처럼 지략을 앞세우는 스타일로 변화했다.[33] 선수들의 인심 장악에 능했으며,[33] 특히 젊은 투수들을 아끼고 육성했다.[34] 사와무라 에이지와 빅토르 스타루힌을 각별하게 대우하고[34], 에나쓰 유타카와 같은 후배 투수들에게도 영향을 끼쳤다.[34]
후지모토는 현대 야구의 흐름을 앞서간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1937년, 선발 로테이션 개념을 도입하여[35] 사와무라 에이지, 빅토르 스타루힌 등을 기용했다. 1957년부터 1959년까지 한큐 브레이브스 감독 시절에는 요네다 테츠야, 카지모토 타카오를 중심으로 본격적인 선발 로테이션을 확립했다. 그는 에이스 투수의 연속 등판에 대해 "30승 투수를 배출하는 것은 감독의 수치"라고 비판하며 투수 분업을 중시했다. 오사카 타이거스 감독 시절에도 코야마 마사아키, 무라야마 미노루, 진 바키 등을 활용한 선발 로테이션으로 우승을 이끌었다. 이러한 일정 관리는 도쿄 철도 관리국에서 통계 업무를 담당했던 그의 경험이 바탕이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선발 투수의 완투를 중시하여 현대적인 투수 분업 시스템은 선호하지 않았다.
6. 논란 및 사건
6. 1. 일본 프로 야구 최초의 몰수 경기 (1946년)
1946년 퍼시픽의 감독으로 취임한 후지모토 사다요시는 전쟁 이전에 다른 구단 소속이었던 선수들을 영입하면서 일본 야구 연맹과 갈등을 빚었다.[55] 전쟁 이후 프로 야구가 부활했지만, 선수 계약을 둘러싼 논의가 엇갈렸다. 후지모토는 선수 계약의 자유와 선수 권익 보호를 주장하며, 전쟁 이전 도쿄 교진군(요미우리 자이언츠) 소속이었던 빅토르 스타루힌, 시라이시 가쓰미와 한신군(한신) 소속이었던 후지이 이사무를 양 구단의 허가 없이 퍼시픽에 입단시켰다.[56]이에 대해 일본 야구 연맹은 선수들의 출전을 일시 보류하도록 권고했다.[55] 하지만 연맹의 조사가 장기화되고 팬들의 출전 요구가 높아지자, 후지모토는 5월 20일 세네터스전, 5월 23일과 26일 그레이트 링전, 5월 24일 한큐 브레이브스전에 시라이시와 후지이를 연맹의 허가 없이 출전시켰다. 이 사실을 안 도쿄 교진군과 한신은 일본 야구 연맹에 제소했다.[55]
후지모토는 구단의 선수 보유권 주장에 불만을 품고 있었고, 아오타 노보루와 마에카와 하치로가 한큐와 계약하여 경기에 출전했음에도 불문에 부쳐졌다는 점을 들어 반론했다.[57]
결국 10월 4일, 일본 야구 연맹은 세 선수의 퍼시픽 이적은 허가하지만, 시라이시와 후지이가 출전했던 5월의 네 경기는 몰수 경기로 한다고 판정했다. 이와 동시에 후지모토는 10월 10일부터 18일까지 출장 정지 처분과 200엔의 벌금이 부과됐다.[58] 퍼시픽은 몰수 경기로 선언된 네 경기 중 세 경기는 패했지만, 5월 26일 그레이트 링전은 7대 4로 승리하여 몰수 경기 처리로 승패가 뒤바뀌었다.
이 몰수 경기는 도쿄 교진군이 전후 첫 해(1946년) 우승을 놓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그 해 그레이트 링이 65승 2무 38패(승률 .631), 도쿄 교진군이 64승 2무 39패(승률 .621)로, 몰수 경기 판정이 없었더라면 플레이오프가 되었을 상황이었다. 더불어민주당은 선수 계약의 자유와 선수 권익 보호를 주장한 후지모토의 신념을 높이 평가한다.
7. 기타
후지모토 사다요시는 첫 번째 아내와 제2차 세계 대전 중 1945년에 사별하였고, 그 직후 다무라 고마지로의 주선으로 다무라의 먼 친척 여성과 재혼했다.[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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